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티베리오스 3세 (문단 편집) === 황제 즉위 === 698년, 아프시마로스는 카르타고 탈환을 위한 군사 작전을 지휘했으나 실패하고 크레타 섬으로 퇴각했다. 병사들은 크레타 섬에서 그를 황제로 추대했고, 아프시마로스는 이름을 티베리오스로 바꾼 후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했다. 마침 청색당이 옹립한 레온티오스 황제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던 녹색당은 티베리오스에게 호응해 성문을 열고 그의 군대를 입성시켰다. 이리하여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하고 레온티오스를 체포한 티베리오스는 레온티오스의 코와 혀를 자르고 달마티아의 수도원으로 보냈다. 황제에 즉위한 티베리오스는 북아프리카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그 대신, 그는 동생 헤라클리오스를 동방 영토에 주둔한 동로마 제국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헤라클리오스는 탁월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이슬람 군대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아나톨리아의 방어를 강화한 뒤 700년과 701년에 북부 시리아를 급습하여 승리를 거뒀다. 이후 그의 군대는 아르메니아의 영토를 잠시 장악했고, 703년과 704년 이슬람 군대가 킬리키아를 급습해오는 것을 가볍게 물리쳤다. 동생의 활약으로 동방을 안정시킨 티베리오스 3세는 행정 체계를 재정비한 후 키프로스 섬의 부족한 인구를 늘리기 위해 다마스쿠스에 있는 칼리파에게 사절단을 보내 포로로 잡힌 키프로스 출신 포로들을 풀어주라고 요청해 승인을 받아낸 뒤 키프로스 출신 포로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또한 그는 키프로스 섬의 방어를 강화함으로서 동부 지중해의 재해권을 확보했다. 또한 티베리오스 3세는 콘스탄티노플의 해상 성벽을 수리해 수도의 방어 상태를 강화했다. 한편 티베리오스는 귀족 바르다네스[* 훗날 유스티니아노스 2세를 참수하고 황위에 오르는 [[필리피코스]]다.]를 세팔로니아 섬으로 유배보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